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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에 그려진 그림들

by 아이와그림 2022.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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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부터 꽃병까지 병풍에 그려진 그림

병풍은 온돌이라는 한국의 주거 형태에서 엄동설한에 웃풍을 막아주기도 하고, 칸막이 역할을 하여 하나의 공간을 여러 개의 공간으로 분할해주는 등 매우 효과적인 쓰임새를 가진 물건이었다. 산수화나 화조도, 어락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화가 병풍으로 꾸며졌고, 책거리, 호피도, 화병도 등과 같은 기용화 역시 병풍으로 많이 꾸며졌다.

책가도는 문방사우, 책탁문방도, 기명화, 기용도, 문방도 등으로도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순우리말 표현인 책거리라고 쓴다. 거리란 길거리와 같은 도로, 일거리와 같은 작업, 반찬거리와 같은 사물, 굿거리 같은 춤이나 연극의 장면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인데, 책거리에서의 거리는 구경거리라는 뜻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책거리는 책을 중심으로 사물들을 늘어놓은 모습, 혹은 책장 속에 배치해놓은 문방사우나 이에 관련된 물건들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주로 사랑방이나 선비의 방에 놓였던 책거리는 고매한 학덕을 쌓기 위해 힘쓰는 문인들의 소망을 담고 있으며, 글 읽기를 즐기고 학문의 길을 추구하던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고스란히 유추해볼 수 있는 그림이다. 예컨대 책거리에서 서가에 쌓인 많은 책들은 선비들이 가장 이상으로 여겼던 학식을 쌓고자 했던 마음과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다'는, 남에게 자랑삼고 싶은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책거리에는 책과 문방사우뿐 아니라 책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용품, 즉 술병과 술잔, 주전자, 찻잔, 바둑판, 담뱃대, 부채, 시계, 등잔, 촛대, 꽃병, 대접, 단지, 약그릇, 항아리, 괴석, 분재, 화분, 활, 화살이 담긴 화살통, 지팡이, 안경, 거문고, 가야금, 단소, 대금, 생황, 해금 등은 물론이고 치마, 꽃신, 족두리, 식물, 동물, 꽃, 과일, 물고기, 기린, 해태, 사불상과 같은 영수 조각상 등도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사랑방에서 사용하는 생활용품이거나 사랑방을 꾸미는 용도의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채소나 과일은 수박이나 오이, 참외, 유자, 복숭아, 석류, 가지, 불수감 등이 그려졌는데, 씨앗이 보이게 표현되어 수복이나 다자와 같은 기원을 나타낸 것도 있고,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그려져 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판소리 흥부가 사설에서 흥부가 부자가 된 후에 사랑방을 치장하는 대목을 보면 조선 시대 선비들이 갖추고 싶어 한 서적은 무엇이었고, 문방구는 어떤 것들이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이를 통해 책거리 소재로 사용되던 내용물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방은 남성들만의 공간이다. 서재 겸 손님을 접대하던 응접실이기도 하다. 흥부가의 사랑 치레처럼 사랑을 잘 꾸미는 것은 남에게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일종의 과시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 행위이기도 했을 것이다.

책거리는 산수화나 화조도와는 달리 입체적인 느낌이 나도록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책거리의 책은 가까운 것은 크게 그리고 멀리 떨어질수록 점점 작아지게 그린 것이 아니라, 뒤쪽으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는 역 원근법으로 그렸다. 시점 또한 특정한 시점이 없거나 여러 개의 시점으로 그리는 다시 점 방식으로 그려졌는데, 책거리만의 특징인 이 독창적인 시각은 주목할 만하다.

책의 모양이나 쌓아놓은 책의 부피, 표지의 무늬 등이 일직선으로 곧게 그어져 있고, 마치 눈금 있는 잣대를 사용한 것처럼 정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책거리의 특징이다. 그러나 선 하나하나를 눈여겨 살펴보면 자를 사용하지 않고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화원을 양성하던 기관에서 그림 수업을 할 때 한 가지 그림의 본을 가지고 직선이나 곡선 그리기를 적어도 2천 번 이상 반복 훈련시켰다.”는 도화서의 회화수업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하는 작품이 바로 책거리 그림들이다. 아마도 고급스러운 책거리 제작은 특수한 그림 수업에 익숙한 화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으리라 짐작된다.

보편적으로 민화에서는 작가나 연대 등을 알 수 있는 낙관이나 명문을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책거리에서는 펼쳐놓은 책이나 편지, 편지봉투를 그리면서 책의 내용 속에 작가의 이름을 써넣거나, 주인의 주소와 성명이 적힌 봉투를 그려 넣어 은연중에 작가나 주인을 밝히는 재치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책거리는 어린이방 치장에도 많이 쓰였는데, 어린이방에 놓인 책거리는 어린이들에게 어울리는 소재를 그렸다. 아기의 돌상에 붓, 화살, 책, 돈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놓고 이를 아기에게 집게 해, 잡은 물건이 상징하는 바에 따라서 아기의 장래를 점쳐보는 풍습과 같이 어린이방에 놓는 책거리에는 아이의 장래에 대한 바람을 담았다.

호피도는 호랑이 가죽을 펼친 형태로 그린 그림으로, 마치 진짜 호랑이 가죽을 펼쳐놓은 것같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호랑이 가죽 그림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표범 가죽을 그린 것이 많고, 병풍으로 꾸며진 그림이 많다. 책거리 그림과 마찬가지로 장식성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무늬를 매우 세밀하게 그려 미학적 가치를 부각하는 데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식적인 용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살아 있는 호랑이 그림은 아니지만, 무서운 호랑이의 가죽 그림을 병풍으로 꾸며 방안에 두거나 시집가는 새색시의 꽃가마 지붕 위에 덮어서 잡귀를 쫓는 액막이 용도로도 중요한 쓰임새를 갖고 있다. 호피도 또한 호축삼재의 의미가 담긴, 잡귀의 침범이나 액을 막는 일종의 벽사용 그림으로 볼 수 있다.

호암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호피도 중에 그림의 가운데 부분에 서재를 덧그려 넣은 병풍이 있다. 아마도 이 호피도 병풍을 커튼처럼 사용하던 주인이 마치 호피도 뒤에 진짜 서재가 있는 것처럼 꾸민 것 같다.

화병도는 꽃이 가득 꽂혀 있는 꽃병을 그린 그림이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화병을 진기한 병으로 여겼는데, 예컨대 '보병'은 '보평’과 독음이 같아 평안함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했다. 화병은 단순히 꽃을 꽂아 실내를 장식하기 위한 용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평안을 가져다주는 길상적 상징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원래 꽃을 꽂아놓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것이지만 민화에 등장하는 화병에는 꽃과 거리가 먼 붓과 같은 문방구를 꽂아놓는 경우가 있다. 또 화병에 공작새의 깃털이 두세 개 정도 꽂힌 것도 볼 수 있는데, 공작새 깃털은 길상적인 염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옛사람들이 공작새를 '얼굴이 단정하고 소리가 맑고 명랑하며 걸을 때 날개가 가지런하고, 때를 알아서 행동하고 먹고 마실 때 절도가 있고 늘 지족함을 알며, 자웅이 서로 흩어지지 아니하고 음란하지도 않으며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줄 아는 새'라고 인식한 데서 연유한다. 그래서 공작새는 최고의 높은 관직을 상징하는 동물로 인식되었고,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수양한 후 문관으로서 입신출세에 대한 염원의 징표처럼 인식되었다. 품계가 높은 무관이 쓰는 전립에 공작새의 깃털을 장식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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