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표의 꽃 그림
이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꽃은 제각기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양과 빛깔, 그리고 향기를 가지고 있다. 화단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나 그윽한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있지만, 산과 들에서 아무렇게나 피고 지
는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마음을 끌지 않는 것이 없다.
산자수명하여 금수강산이라 일컬어지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자연 풍광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우리 민족은 이런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면서 유난히 꽃을 사랑하였고 남다른 미적 감각을 갖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꽃이 아름다움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번영, 부귀, 행복, 축복 등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사랑, 숭배, 존경, 위문, 축하 등을 표하는 마음의 정표로서 다양한 종류의 꽃을 사용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일상생활에 쓰이는 다양한 소품에도 꽃을 장식하여 수복부귀다남강녕 등의 상징을 담았다. 특히 화초장, 화관, 꽃댕기, 꽃, 꽃반지, 화문석 등 부녀자들이 안방에서 쓰던 다양한 생활용품은 대부분 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의식에서도 헌화는 숭고한 행위였다. 특히 불교에서는 부처님에게 바치는 여섯 가지 공양물(꽃향초탕과일차) 중 첫 번째가 꽃공양이다.
우리 음악에도 꽃을 소재로 한 노래가 많다. 풍류를 즐겼던 우리 선조들은 철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시문이나 그림의 소재로 즐겨 다루어왔다. 꽃을 읊은 시문은 한없이 많고, 화훼도나 화조도 등에 꽃과 함께 의좋게 노니는 한쌍의 새를 소재로 담아서 그린 그림도 수없이 많다. 옛사람들은 꽃을 이렇게 노래했다.
모란은 화중왕이요 향일화는 충신이로다.국화는 은일사요 매화는 한사로다. 규화는 무당이요 해당화는 기생이로다. 이화는 시각이요 홍도 벽도 삼색도는 풍류랑인가 하노라.
모란은 화려하면서도 귀족적인 자태가 단연코 꽃 중의 제일이므로 꽃중의 왕이라 불렀고, 향일화(向日花: 해바라기)는 오로지 해를 따라 움직이는 특성이 일편단심의 충신에 비유되었으며, 진흙과 연못의 더러운 물속에서도 고결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연꽃은 그야말로 세속에 살면서도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군자로 비유될 만하다고 여겼다. 매화는 번잡하지 않고 잎새 없는 가지에서 소담하게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욕심 없이 살아가는 선비와 같은 느낌을 주고, 은은하고 점잖게 피어나는 박꽃은 곱게 나이 든 노인의 느낌을 준다. 석죽화( 패랭이꽃)는 이름이 돌, 대나무와 같은 독음을 지녀, 돌처럼 변하지 않고 대나무처럼 늘 푸르름을 간직한다 하여 소년에 비유하였다. 규화(접시꽃)는 키가 크고 꽃이 아래부터 위로 차례차례 피어 올라가는 특성을 지녀 낮은 벼슬에서 차례대로 승진한다는 뜻으로 여겼으며 이런 까닭에 선비의 정원에 심어 가꿨다.
민화에 등장하는 꽃은 대략 40여 종이나 된다. 화훼도에서 보이는 꽃의종류로는 치자, 홍화, 울금, 쪽, 황촉규, 소방 목, 황벽, 지초, 단풍나무, 산딸기, 앵두 등 자연 염색에 쓰이는 꽃이 가장 많다. 연꽃, 매화, 난초, 산국화, 홍도화, 산수유, 모란, 옥잠화, 동백, 산신화 등 식용이나 약용으로 사용되는 꽃도 있다. 그리고 오동나무, 진달래, 개나리, 소나무, 버드나무, 메꽃, 해당화 등도 등장한다. 이러한 꽃들은 단독으로 그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여러 가지 식물과 동물, 바위, 물 등과 함께 그리고 있다.
화훼도라고 해서 새나 곤충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꽃이라는 소재에 중점을 두고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을 소재로 한 그림은 모두 화훼도에 포함될 수 있겠지만, 한 화면에 함께 그려진 다른 소재들에 따라 좀 더 종류를 세분화할 수도 있다. 새와 같이 그려진 것은 화조도로, 곤충과 함께 그려진 그림은 초충도로 분류하고, 화훼도는 거의 꽃만을 주소재로 다룬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화훼도는 꽃 그림 양상의 변화에서 화조도나 초충도로 분화하기 이전인 초기의 상태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화훼도는 꽃잎, 꽃술, 줄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때로는 더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과장되게 표현하며 가끔은 꽃의 종류가 구별이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색채가 실물과 같아 그림을 보고도 각각의 꽃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이며 섬세하고 예리한 세부 표현이 이채롭다.
꽃 그림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모란도의 모란은 단연 눈에 띈다. 꽃 중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모란은 꽃을 소재로 한 그림 중에 가장 비중이 높다. 모란은그 자태의 화려함으로 인해 부귀의 의미를 갖고 있다. 모란 그림은 주로 병풍으로 꾸며서 신방이나 안방 장식에 쓰였고 제례용이나 궁중에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괴석모란도는 모란도 중에서도 괴석 주변에 탐스럽고 화려하게 활짝핀 모란을 그린 그림으로, 특히 병풍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창덕궁 대조전에 있던 일명 궁모란도라 불리는 여덟 폭 대형 병풍이다. 뛰어난 기교와 장식성을 지니고 있으며 조선 시대 화원들의 수준 높은 회화 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된 그림이다.
괴석모란도 병풍은 모란이 꽃 중의 왕으로 임금을 상징한다 하여 궁중용 병풍으로 사용되었다. 궁중 괴석모란도 병풍을 보면 괴석 위에 튼튼한 줄기와 잎 사이로 탐스럽게 활짝 핀 꽃송이를 흰색, 자홍색, 흑자색, 노란색 등화려한 색감으로 채색했으며, 대칭 구도 또는 연속 구도로 그렸다.
민간에서도 각양각색의 괴석과 함께 활짝 핀 탐스러운 꽃송이와 함께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꽃봉오리가 달려 있는 모란을 그린 모란도 병풍을 많이 사용했는데, 모란이 부귀 안락과 남녀 화합을 상징하기 때문에 특히 혼례식의 대례병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궁중에서 사용된 모란도와 혼례식에서 쓰인 모란도는 벌이나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고 모란만 단독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모란도를 보면 대개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이를 보면 모란도는 어떤 일정한 틀에 따라 그린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모란도에 그려진 꽃은 여자 혹은 신부로, 괴석은 남자 혹은 신랑으로 비유해서 음양사상으로 풀이하는 학자도 있다. 그래서 모란도 병풍은 혼례 때 외에도 신혼부부의 신방을 장식하거나 회갑 같은 좋은 날에 쓰였다. 무속과도 연관시켜 무당의 신당 장식이나 굿과 같은 의식에 쓰이기도 했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화려한 꽃이었기 때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다.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유득공(1749~?)의 경도잡지에 공적인 큰 잔치에는 제용감, 나라에 진상되는 포물이나 비단 등을 다루는 관청으로, 직물과 관련된 물품을 조달하는 일에서 모란을 그린 큰 병풍을 쓴다. 또 문벌이 높은 집안의 혼례 때도 이 모란 병풍을 빌려서 쓴다."라는 대목이 있다. 모란 병풍은 문벌이 높은 집안에서도 빌려 썼을 만큼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서민들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련한 병풍을 혼례식 때나 축하해야 할 행사가 있을 때 빌려서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란의 원산지는 중국인데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다른 꽃과 함께 그려지지 않고 모란만 그려진 모란도에는 대부분 벌이나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의 영민함을 보여주는 세 가지 일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해볼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당나라 초에 당태종 이세민이 빨간색, 자주색,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각각 한 되씩 신라로 보내왔는데, 덕만공주(후의 선덕여왕)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꽃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씨를 심어 꽃이 피고 보니 과연 그러했다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일화를 표현하기 위해 모란에 벌이나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것인지, 이러한 일화 때문에 모란에는 향기가 없다고 생각해 벌이나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모란은 향기 없는 꽃이 아니라는 점이다.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어 모란꽃에도 벌이나 나비가 찾아든다.
모란도 이외의 화훼도의 연꽃은 모란만큼이나 그림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는 꽃이다. 모란이 화중왕이라면 연꽃은 화중군자로 표현할 수 있다. 진흙 속에서 살면서도 더러운 물 한 방울 몸에 묻히지 않는 기품 있는 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세파에 물들지 않는 청아함과 고결한 모습을 간직한 군자에 비유되곤 한다.
중국 송나라 때 대학자로 추앙받은 주무숙도 모란은 부자나 귀인과 같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연꽃은 학덕이 높은 군자와 같다.라고 하여 연꽃을 때 묻지 않은 군자에 비하여 칭찬하고 있다.
연꽃은 불교 사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지만, 유교에서도 불교 못지않게 군자의 꽃으로 찬양하는 꽃이다. 그러한 점 때문에 옛사람들은 연꽃을 즐겨 집 안에 가꾸기도 하고 화폭에 옮기기도 했다. 연꽃은 또한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장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아들을 얻고 싶은 염원을 화병에 꽂힌 연꽃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또 연밥에 촘촘히 박힌 연실은 다남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연꽃의 연자가 연이어진다는 뜻의 연과 독음이 같으므로 자를 써야 할 곳에 대신 연꽃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연달아 아들을 많이 낳길 바라는 뜻을 담아 아들을 상징하는 대상과 연꽃을 함께 그리는 경우에서 이런 예를 볼 수가 있다.
이 외에도 사군자의 하나인 국화를 그린 민화도 자주 볼 수 있다. 국화는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이 귀거래사를 읊은 후 동쪽 울타리 밑의 국화를 따며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았다 하여, 유유자적 은둔해서 살아가는 은일자를 상징한다.
장미는 월계화 혹은 장춘화라고도 하는데, 월계화는 이름 그대로 매달 연이어 꽃이 피는 특성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고, 장춘이란 청춘을 오래 간직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미 그림은 늙지 않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청춘을 오래 누린다는 의미로 읽히고 있다.
지초는 불로초라고 알려져 있는 것으로, 요즈음은 우리가 어렵지않게 대할 수 있는 영지버섯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십장생과 같이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화훼도에서는 단독으로 그려서 불로장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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